‌*trigger warning :: 사망 , 부상 , 식인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 읽으시기에 불쾌한 내용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
*벤x술루(왼쪽 오른쪽에 대한 내용 없음)가 7번 문단에 아주 약간 포함 되어 있습니다 .
*영화와는 몇몇 다른 설정들이 있습니다.
*미러버스 (미러본즈x미러커크)


‌1.

‌"사자가 되고 싶어요."

레너드 맥코이는 어떤 동물이 되고 싶냐는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다. 23세기의 조지아 주에는 더 이상 제대로 된 동물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말은 즉슨 그가 단 한 번도 실제로 사자를 본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렸을 적부터 사자라는 동물에게 남들과는 다른 집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영혼의 끌림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사자라니, 좋은 선택이에요. 솔직히 예전부터 개가 되고 싶다는 사람이 수두룩했거든요. 세상에 개가 넘쳐나는 것도 그 때문이죠."


자신을 기관의 매니저라고 소개한 남자가 말했다.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와 고급스럽게 치장한 옷가지들이 그의 신분을 말해 주는 듯 했다. 아내라 소개 받은 여인은 인형 같은 모습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쓸데없는 사담이 너무 많다. 레너드는 최대한 빨리 그들이 방에서 떠나주었으면 했다.


다행히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은지 남자는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곳에서는 당신의 또 다른 완벽한 짝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길 바라고요. 45일의 시간이 주어져 있다는 걸 늘 잊지 마세요."


웃기지도 않는 말이다. 완벽한 짝이라니. 레너드는 방을 빠져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코웃음 쳤다. 45일의 유예 기간을 받게 되었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아내에게 버림 받았고, 팔려가듯이 기관으로 넘겨졌다. 다시 짝을 구하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 버려지게 될 것이다. 비단 레너드뿐만이 아니었다. 기관에는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혼자 남겨진 사람들이었다.


완벽한 짝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는 전망 좋은 방을 배정 받았다. 비록 지구는 아니었지만 창문의 바깥으로 보이는 하늘은 눈부시게 맑았고, 멀리 우거진 숲이 보였다. 열린 틈으로 끼리끼리 모여 있는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기만하는 행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레너드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차라리 동물이 되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사자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는 훨씬 편하잖아.


그는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었다. 두 손으로 세수를 한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쳐다본 거울에 무표정한 얼굴이 비쳤다. 무표정 한 게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일 수도 있다. 생각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사자가 되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수 있고, 주는 대로 먹고, 마음대로 자고, 배변하고, 욕구에 의해 번식하고.


그리고 혼자가 아니게 되겠지.


‌2.

‌아침이 밝았다. 눈을 뜨자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302호, 39일 남았습니다.'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주어진 유예기간은 45일이었는데 벌써 6일이 지난 채다. 일주일 남짓한 시간 동안 레너드는 그저 죽을 날을 받아놓은 사람처럼 기관에서 준비한 하루 일과를 소화하는 것이 전부였다. 느즈막하게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맥코이 씨."
"안녕, 체콥."


체콥은 유일하게 레너드가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다.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겼다고 하는 청년의 얼굴은 무척 앳되어서, 얼핏 봐서는 미성년자라고 착각 할 수도 있을 법 했다. 오늘이 32일 째라고? 감흥 없이 묻는 말에 네,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머쓱하게 웃으며 뺨을 긁적인다. 약간의 안타까움마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가 양으로 변하면 잘 어울릴 것 같긴 했다. 무슨 동물이 되고 싶다고 말했는지는 딱히 알고 싶지 않다. 양이라, 한 입 거리겠군. 자연스레 사자가 된 자신이 그를 잡아먹는 상상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어차피 같은 동물원 신세 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각자 다른 우리에 갇히겠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는 약간의 자유 시간이 있었다. 바깥에 준비 된 의자에 앉아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지평선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절로 눈이 시려왔다. 그건 꼭, 얼마 남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찬사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못했다. 레너드는 모든 게 지긋지긋 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는 없다. 그러나 아등바등 살아갈 용기 또한 없다. 짐승만도 못한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형체가 없는 누군가는 그 질문에 사랑이라 답했다. 레너드가 외쳤다. 개소리!


‌3.

‌히카루 술루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완벽한 짝을 찾아 헤매던 사내였다. 레너드는 그를 기억한다. 말이 잘 통하는 이였다. 술루는 레너드에게 절대 동물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선언한 날로부터 며칠 후, 새로운 커플이 되어 2인실로 옮겨졌다. 모두가 그를 축하해 주었지만 레너드만은 그럴 수 없었다. 술루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소하지만, 인생을 송두리 째 바꿀 만큼이나 커다란 거짓말이었다.


‌4.

‌억센 덤불이 다리를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 레너드는 총부리에 달린 칼을 이용해 덤불을 쳐냈다. 외에도 무수히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다. 같은 호텔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외톨이들이 그들을 피해 더 깊은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한 명을 잡을 때마다 하루씩 유예기간이 늘어났다. 잡힌 외톨이들이 어떻게 되었을 지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세상의 규칙을 거부하고 도망친 이들에게 적합한 벌이 내려졌을 것이다.

그는 제 몸을 다 가려줄 만큼 두꺼운 나무를 붙잡고 서서 거친 숨을 골랐다. 젠장, 젠장, 젠장. 욕지거리가 마구 튀어나갔다. 이대로 기관에 돌아가게 되면 또 다시 같은 날들이 반복 될 것이다. 그래야만 할까? 정말로? 마취 총으로는 죽을 수 없다. 떨리는 손이 총부리를 턱 밑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예리한 칼끝이 목울대를 찔렀다. 고통이 없을 수는 없다. 이대로 단숨에, 꿰뚫기만 하면…….


"자살 할 거야?"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총을 떨어뜨렸다. 레너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한 남자가 서있었다.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다를 닮은 새파란 눈이었다. 홀린 것 마냥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자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자살 할 거냐니까?"
"뭐…."
"하고 싶으면 해. 안 말려."


뒤늦게서야 깨달을 수 있었지만, 그는 외톨이들 중 한 명이었다. 기름 져 축 늘어진 금발이 지저분 해보였다. 오랜 시간 야생에서 살아온 흔적 일 것이 분명하다. 더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 아름답다. 아름다웠다. 그래, 삶보다도 강렬한 아름다움이 뇌리에 또렷이 각인 된다.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꼼짝도 못하고 서 있기만 한 레너드를 보며 쯧 혀를 찼다.


"그냥 겁쟁이였나."


순간 레너드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잠깐, 기다려. 목소리를 내는 대신 다급히 손을 뻗었다. 자리를 떠나려던 남자가 부스럭거림을 듣고 뒤를 돌자, 그제야 레너드는 메여버린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이름, 이름을 알고 싶어.


"내 이름? 글쎄, 어차피 죽을 거라면 굳이 알 필요 없잖아?"
"내게서 원하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줄게."


아무렇게나 튀어나간 말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 말, 책임 질 수 있어?"


레너드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총을 그에게 내밀었다. 조금 놀란 눈치였으나 남자가 순순히 총을 받아들었다. 뭐, 좋아. 이름 정도로 원하는 걸 준다면야. 그리고는 레너드를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뼈째 씹어 먹을 것만 같은 눈빛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시선이 멈춘 곳은 마찬가지로 눈이었다. 남자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드리었다. 너, 나처럼 눈 색이 예쁘네. 마음에 들어.


‌5.

‌"내 이름은 제임스 커크야."
"레, 레너드…맥코이."
"그래, 맥코이. 우린 또 볼 수 있을 거 같은 예감이 들어."


피가 흐르는 한쪽 눈가를 손으로 애써 틀어막고, 레너드는 다른 이들과 함께 기관으로 돌아왔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끔찍한 고통에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제임스 커크라는 이름만이 오롯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텅 빈 눈의 상처가 아물어 갈 때쯤 레너드는 유예기간을 9일 째 남겨놓은 상태였다. 숲 속으로 떠날 생각을 하느라 열중인 그에게 파리한 안색을 한 체콥이 다가왔다. 맥코이 씨, 그동안 감사했어요. 그제야 체콥의 유예기간이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물이 되는 구나. 담담히 마주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웠어.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말을 잇는다. 나중에 꼭 절 보러 와주세요. 그 뜻을 이해 한 것은 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였다.


체콥은 늑대가 되어 도시의 동물원으로 떠났다.


사람들이 모두 아침 식사를 하러 건물에서 빠져나간 시간에, 레너드는 필요한 짐을 간추려서 방을 나섰다. 복도에는 침대 시트를 갈러온 메이드 한 명이 있었는데, 그녀가 불쑥 물었다. 떠날 거 에요?


레너드는 메이드를 죽여야 하나 고민했다. 기관을 떠나지도 않고 잡힐 수는 없다. 아무 대답도 내어놓지 않았지만 곧 메이드가 다가와 속삭였다.


"저쪽으로 나가요."
"…지금 날 도와주는 겁니까?"
"마음대로 생각해요. 하지만 사람들 몰래 나갈 수 있는 문은 저쪽이에요."


레너드는 그녀의 유니폼에 달려있는 명찰을 보았다. 니요타 우후라. 할 말을 마친 듯 유유히 떠나가는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후, 그녀가 가리킨 문을 쳐다보았다. 물론 그 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일은 없었다.


‌6.

‌"또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지?"

양 옆으로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있는 도로를 걷다 샛길로 빠져들었다. 외톨이들이 사는 곳까지 가려면 깊숙이 들어가야만 했다.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그와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어서 와, 맥코이. 그는 며칠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우리랑 살면 유예기간 따위는 없어. 원한다면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아도 돼."


단, 규칙이 하나 있어. 서로 사랑하지 말 것. 들키지만 않으면 상관없지만 말이야. 커크가 웃었다. 들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 별 거 없어. 우린 만약을 대비해 각자 무덤을 파놓거든. 산 채로 묻어 버릴 뿐이야. 무덤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그 후부터는 본인의 몫이지.


그의 말을 들은 레너드는 본인의 말로를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었다. 눈이 먼 나머지 제 발로 무덤에 뛰어들 게 분명하다고. 반쯤은 사실이었다. 그는 이미 한쪽 눈을 잃은 채였고, 오로지 제임스 커크를 만나기 위해 기관에서 도망쳐 외톨이들의 사회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사랑이라 확신 할 수는 없었다. 여태까지 완벽한 짝이란 존재 할 수 없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무리에는 별별 사람들(물론 종족도 다양했다)이 다 모여 있었다. 그는 외톨이들 중에서 유일한 의사(전공은 소아과였지만)였기에 원하지 않는 관심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정작 커크는 늘 한 걸음 떨어진 채 저를 관찰하고만 있었다.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말이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그의 신경을 조금 더 오래 빼앗고 싶었다.


둘은 자주 시선을 마주했고, 차츰 가까워졌다. 레너드는 무리에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모두가 그를 닥터라 불렀다. 물론 커크만은 예외였다. 레너드도 마찬가지다. 그는 누구보다도 다정한 목소리로 커크를,


"짐."


이라 부른다. 커크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맥코이, 날 따라와."


니요타 우후라와 재회하게 된 것은 외톨이가 된 지 딱 한 달이 지난 후였다. 레너드는 커크가 가리킨 수풀 뒤에 숨어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관에서 눈치를 챈 것 같아요."


짧게 내뱉은 말에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엿보였다.


"더 이상은 못해요."
"그래, 알았어."


커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이번 거사만 성공하면 더 이상 도와주지 않아도 돼. 다른 사람을 찾아볼게. 너만큼 잘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우후라가 작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내가 더 고맙지. 아, 그런데."
"네?"
"부탁한 콘돔은 챙겨왔어?"


순간 발을 삐끗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밟은 탓에 빠직, 하는 소리가 났다. 커크가 낄낄 거렸다.


‌7.

‌거사(거사란 외톨이들만의 행사로, 기관에서 맺어진 커플들에게 완벽한 짝이란 존재 할 수 없음을 알려주는 일을 뜻한다. 어린 아이들이나 할 법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가 있는 날이었다. 커크와 레너드, 이름 모를 남녀 한 쌍이 부부인 척 위장하고 도시로 향했다. 비어있는 한쪽 눈을 가리기 위해 안대를 썼더니 주변에서 흘끔 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는 백화점 한 가운데에 서서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러 간 커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멀리서 보안 요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온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혼자 오셨습니까?"


레너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 짝과 함께 왔습니다."
"결혼 증명서를 보여주시겠어요?"
"제가 잘 잃어버려서 제 짝이 갖고 있습니다. 아, 마침 저기 오는군요."


어느새 돌아온 커크를 어색하게 끌어안았다. 늦어서 미안해, 배가 너무 아파서 어쩔 수 없었어. 그는 제 양 뺨에 입술을 부딪히고 자연스레 팔짱을 껴오더니, 보안 요원에게 무슨 일 있나요? 하고 물었다. 어디를 다녀왔냐고 묻는 말에는 화장실에 다녀왔다고 대답했다. 레너드는 타이밍 좋게 결혼 증명서 얘기를 꺼냈다. 물론 자기가 갖고 있다며, 본인의 것도 보여주어야 하냐고 너스레를 떨자 보안 요원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됐습니다. 두 분 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둘은 짐을 나눠들고 다른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너랑 내가 아주 잘 어울리나 봐."


커크가 어깨에 고개를 기대오며 말했다. 그러게. 조용히 맞장구를 쳤지만 누구도 그렇게 생각 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밤이 깊어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기관으로 향했다. 총 세 커플이 있는 곳에 숨어 들어갈 예정이었다. 레너드는 그 세 커플 중에 술루가 끼어있음을 알았다. 커크는 기관의 매니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요트로 향하는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빛이 새어나오는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선다. 세 사람이 놀란 얼굴을 했다. 아니, 두 사람이다. 술루의 파트너인 벤과, 기관에서 배정해준 여자아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던 건지 식탁에 도란도란 모여 앉아있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제일 왼쪽에 앉아 있는 술루가 무표정하게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지독하게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안녕, 술루. 오랜만이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입에 발린 말들이 술술 흘러나온다. 레너드는 그들의 앞에서 총을 흔들어 보였다. 가만히 있으라는 경고였다.


"내가 왜 널 찾아왔는지 알아?"
"…글쎄요."


비뚜름한 미소가 걸린다. 레너드도 따라 웃었다.


"완벽한 짝을 찾은 기분이 어때?"
"환상적이죠."
"그거 이상하네. 내가 너였다면 엄청 거지같은 기분 일 텐데."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 에요?"
"파파, 저 아저씨 나가라고 해요."


조용히 있던 아이가 표독스레 눈을 흘긴다. 레너드는 술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총을 겨눴다. 벤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아이를 껴안는다. 느리게 방아쇠를 당기자 철컥이는 소리가 난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경기를 일으킨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건 빈총이야. 총알이 안 들어있지."


술루는 여전히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채였다. 레너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차갑게 일갈했다.


"넌 사랑을 모르잖아. 안 그래?"
"당장 나가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얼굴이 새빨개진 벤에게 등 떠밀려 밖으로 쫓겨나면서도 레너드는 끝까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히카루 술루, 넌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 그를 사랑 하지도 않지.


‌8.

‌넌 감정이 결여 된 소시오 패스야.


‌끈적한 연고를 눈가에 바르고 있자니 문득 생각이 났다.

"짐."
"응?"
"내 눈은 어떻게 했어?"


커크는 옆에 앉아 그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난데없는 물음에 놀란 얼굴을 한다. 그게 왜 갑자기 궁금해진 거야? 커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어떻게 했을 것 같은데?"
"적어도 버리진 않았겠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음, 하는 소리를 낸 그가 다가와 레너드의 입술을 핥는다.


"걱정 하지 마, 네 눈은 내 안에 있으니까."


내가 먹어 버렸거든. 상상도 하지 못한 역겨운 얘기다. 그러나 레너드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지 못했다. 그의 안에 있다는 말에 흥분해버린 자신이 더 역겹게 느껴졌다. 그는 구역질을 하는 대신, 커크의 양 뺨을 붙잡고 잡아먹을 듯이 키스했다. 혀끝에서 쇠 맛이 났다.


‌10.

‌다 쓴 콘돔을 멀리 집어 던진다. 강에 빠지기라도 했는지 물이 첨벙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너드는 커크를 끌어안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엉겨 붙어 있는 이마를 쓸어주었다. 둘은 조금의 틈도 없이 꼭 붙어있는 채였다. 나른하게 하품을 한 커크가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난 동물 중에서 사자를 제일 싫어해."
"왜?"
"…위노나가, 암사자 인 채로 죽었거든."


그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커크가 그의 텅 빈 눈에 손장난을 치며 말을 이었다. 위노나는 날 낳은 여자야.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조지, 그러니까 내 생부인 조지가 죽어서 새로운 짝을 찾으러 기관으로 갔다고 듣기만 했어. 난 대부라는 사람한테 키워졌고, 스무 살 때까진 그가 날 숨겨줘서 짝이 없어도 괜찮았지. 후에 기관으로 넘겨졌지만.


기억을 더듬는 커크의 눈동자가 허공을 유영했다.


"여덟 살 생일에 동물원에 갔다가 그녀를 봤어. 사자는 전부 멋있을 거라고 생각 했었는데 위노나는 고작 뼈와 살가죽이 전부더라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데 어떻게 알아볼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 나와는 다른 색의 눈을 본 순간, 그냥 알게 되었지. 딱히 슬프거나 하진 않았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위노나가 내 생일이 되기 몇 달 전부터 음식을 먹지 않았대. 억지로 먹이려고 해도 전부 토해내기만 해서 결국 사육사들이 손을 놔버렸다나 봐. 새끼를 치려고 다른 수사자들이랑 한 방에 가둬놨더니 너무 반항을 하길래 약을 놓으러 들어간 사육사 한 명을 물어 죽인 적도 있었다더라.


커크는 이제 완전한 타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위노나가 늙어서 그런 거라고들 말했지만, 전부 개소리 일 뿐이야. 결국 죽어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생각 했어. 동물로 사는 것도 별 거 없구나. 동물도 인간도 똑같구나."


그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눈을 마주해왔다.


"맥코이. 아직도 동물이 되고 싶거나, 죽고 싶어?"


제임스 커크를 만나기 전까지의 삶이 떠오른다. 레너드는 사자가 되고 싶었'었'다. 사자가 되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수 있고, 주는 대로 먹고, 마음대로 자고, 배변하고, 욕구에 의해 번식하고. 그리고, 혼자가 아니게 될 것 같았다.


"……아니."


‌11.

‌누가 그랬던가. 짐승만도 못한 삶에는 사랑이란 의미가 있다.


‌12.

‌"우린 정말 완벽한 짝이야."

커크는 기꺼이 그에게 한쪽 뺨을 내어 주었다. 굳이 거절 할 이유는 없었다. 아름다운 것은 산산조각이 나도 아름다운 조각이 된다. 예리한 칼날로 망설임 없이 살가죽을 그었다. 레너드의 얼굴에 남은 것과 비슷한 상흔이 생겨났다. 그 날 그들은 미리 파놓은 무덤에 몸을 밀어 넣고 흙을 덮었다. 어떤 짐승도 무덤 근처를 얼씬 거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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